2단계 니 야마
(Niyama, 勌戒, 예행에 의한 자기 정화)
야마(금계)의 적용은 보편적이지만, 네 야마는 개인적인 수행에 적용하는 행동 규율이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다섯 가지 네 야마는, (1) 사우나(Sacha, 신체의 청결) (2) 산 토사(samtisa, 만족) (3) 타파스 (tapas, 고행) (4) 속도야 (svadhyaya, 성전을 통한 자아 교육) (5) 이수 바라 슬이라니 다나 (Is vara pranidhana.
① 사우 차 Sacha: 신체의 청결은 행복의 필수 요건이다. 외관상으로 목욕과 같은 좋은 습관이 신체를 깨끗하게 하지만, 아사나와 프라다 야마는 내면적인 청결을 가져다준다. 아사나의 수행은 전 육체를 정상적으로 조절해 주고 지나친 방임으로 야기된 독소나 불순물을 제거한다. 푸라나 야마는 폐를 깨끗이 하고, 피에 산소를 공급하며, 신경을 정화한다. 그러나 육체의 물리적 정화조 다 더 중요한 것은 증오, 격정, 분노, 욕망, 탐욕, 기만, 자만과 같은 감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맑지 않은 생각 속의 지성 buddhi를 정화하는 것이다. 마음속의 더러움은 박이 불꽃으로 태워 버려야 한다. 이런 내면 정화에 의해서 빛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비심 saumanasya을 가져다주고, 정신적인 고통, 우울, 비해 와 절망 daurmanasya을 몰아내 준다. 사람이 자비로울 때, 그는 단순히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잘못만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가 갖고 있는 덕(德)까지도 볼 수 있다. 타인의 덕성(德性)을 존경하는 마음은 그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게 만들고 또 자신의 슬픔과 역경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음이 맑으면 '한곳에 집중 (ekagra)' 하기 쉽다. 이 집중으로 사람이 '감각 기능을 조절 (indri ya-jay)' 하게 된다. 귀리고 나면 사람은 자기 육체라고 하는 사원에 들어갈 준비가 되고, 마음의 거울로 자신의 참모습을 본다. 몸, 생각, 말의 청정 외에 깨끗한 음식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서의 청결함 외에도 그것을 취하는 수단의 청결함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평생을 통해 우리를 지탱해 주면서 동시에 소모되는 물질, 그 음식물은 단순한 식물(食物) 이라기보다는 브라만, 즉 우주 순환 원리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입 한 입 먹는 것이 '절대 신성'을 섬기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음식이 청결해진다. 채식주의자냐 아니냐는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개개인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전통과 습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가 수행자는 오롯한 집중력과 영적 계발을 위해서 반드시 채식주의를 채택해야 한다.
음식은 건강, 체력, 에너지와 삶을 증진할 목적으로 취해져야 한다. 그것은 담백하고, 영양가가 많고, 신선하고, 자극성이 없어야 한다. 시고, 쓰고, 짜고, 맵고, 타고, 상하고, 맛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되고, 청경 하지 않은 음식은 피한다. 우리가 먹는 먹거리와 섭취 방식이 그 사람의 인성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기보다는 먹기 위해 살고,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만약 우리가 혀의 구미에 따라 먹는다면, 과식으로 우리의 소화기관은 이상이 생길 것이고 그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요기는 조화를 신봉하고, 그래서 그는 몸을 유지할 목적으로만 먹는다. 또 너무 많아도, 너무 적게도 먹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육체를 영혼의 쉼터로 여기고 자신이 태만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음식 외에도 장소 역시 수행을 위해선 중요한 사항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나 숲, 혼잡한 대도시, 즉 소란한 곳에서 수행은 쉽지 않다. 우리는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고, 곤충이 없고, 폭풍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선택해야 한다. 호수나 강의 둑 같은 곳이나 해변이 이상적인 곳이다. 그러나 그런 조용하고 이상적인 장소는 현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방 한 귀퉁이에 수행 장소를 정해 깨끗하고 공기가 잘 통하고, 건조하고, 해충이 없게 한다.
② 산 토사 Santos: 산 토사 즉 만족(충족감)은 계발돼야 한다. 만족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집중할 수 없다. 요기는 어떤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에 자연히 만족하게 된다. 만족은 요기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신의 사랑을 알고, 그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기쁨을 아는 자는 축복받은 자이다.
만족(충족감)과 평온은 마음의 상태인데 인종, 신조, 부와 학식에 따라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부조화를 낳고, 사람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갈등을 야기시킨다. 그러면 마음은 '오롯한 집중력(ekagra)'을 잃게 되고 마음의 평화마저 빼앗긴다. 영혼의 불꽃이 욕망의 바람으로 흔들리지 않을 때 평온과 만족이 있다. 구도자는 죽은 자의 텅 빈 평온이 아니라 신에 의지하여 확고히 형성된 이성을 가진 자의 평온을 추구하는 것이다.
③ 타파스 Tapas: 불꽃을 일으키다, 타다, 빛나다, 고통받다, 연소한 다를 의미하는 어근 'tap'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인생의 명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타는 듯한 열정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화, 자기 제어, 고행의 의미를 내포한다. 인격 형성을 위한 이 모든 것을 타파스의 수행으로 간주할 수 있다.
타파스는 신성과의 일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고 이 목표를 향해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욕망을 태워 버리려는 의식적 노력이다. 가치 있는 목표는 삶을 계몽시키고, 정화, 신성하게 한다. 그런 목표가 없다면, 행위와 기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타파스가 없는 삶은 사랑이 없는 가슴과 같다. 타파스가 없다면, 마음은 '절대 신성'에 도달할 수 없다.
타파스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육체 Kayika, 언어 vachika, 마음 mana sika와 관련된 것이다. 금욕 brahmacharua과 비폭력 ahimsa는 육체의 타파스이다. 공격성이 없는 말을 하고, 신성을 찬미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결과와 관계없이 진실을 말하고, 남을 헐뜯지 않는 것이 언어의 타파스이다.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 자신을 조절할 수도 있으며, 고요한 마음자리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음의 타파스이다. 이기적인 동기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들풀 한 잎이라도 신의 뜻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굳은 신심으로 행동하는 것이 타파스이다. 요기는 타파스를 통해 강인한 육체와 마음 그리고 인성을 향상한다. 그는 용기와 지혜, 성실, 강직성과 순박함을 얻게 된다.
④ 스바 그야 (Svadhyaya, 성전을 통한 자아 교육)
스바 SA는 자아를 의미하고, 아들 야야 adhyaya는 교육이나 연구를 의미한다. 교육은 사람 속에 있는 최상의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보다 야야는 자아의 교육인 것이다.
그보다 야야는 강사가 무지한 청중 앞에서 자기 지식을 늘어놓는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다. 그보다 야야는 연사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고, 서로 사랑과 존중을 가지게 된다. 설교는 있을 수 없고, 가슴과 가슴이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 바 등 야 야로부터 일어나는 고상한 생각은 그의 혈관을 타고 흘러 그의 삶과 존재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 바 등 야 야를 수행하는 사람은 삶이라는 자신의 책을 읽음과 동시에 그 책을 만들고 수정한다. 인생관이 바뀌게 되고, 그는 모든 만물이 향락 boga보다는 오히려 박이(신심 또는 헌신) 을을 위해 존재함을 깨닫게 시작한다. 즉, 만물은 신성하고, 그 자신 안에 신성이 있고, 그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우주를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노바 바베 (Sri Vinoba Have, 부담 boodan운동의 지도자)에 의하면, 그보다 야야는 수많은 주제나 행위의 기초 또는 근간이 되는 주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맑은 장소에서 신성한 학문을 정규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의 성전을 공부하는 것은 구도자에게 집중력을 주고, 인생의 험난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무지를 끝내고 지식을 가져다준다. 무지는 시작은 없지만 끝은 있다. 지식은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그 바 등 야 야 구도자는 그의 영혼 실체를 알게 되고, 신성과의 영적 교감을 얻게 된다. 세계의 성전은 모든 이가 읽을 수 있다. 이는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마치 꿀벌이 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모으는 것처럼, 구도자는 각각 다른 믿음 속에 있는 것을 흡수하여 자신의 신심을 더욱 굳건히 안다.
언어학은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체계적 학문으로, 그것을 공부하는 것은 그 언어를 더 잘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요가 자체가 종교가 아니고 '종교적 수행의 한 형태'로 그것의 연구를 통해 구도자는 자신의 신심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⑤ 이수 바라 프라이 다나 [Is vara pranidhana, 자재임(절대 시성)에 대한 헌신(신심)]
자신의 행위와 의지를 절대 신성에 바치는 신심이 이수 바라 파랗습니다. 나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이는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밝힐 수 있다. 만물이 절대 신서에 속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만심으로 득의양양하지 않고, 권력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며 오직 신심으로 머리를 숙인다.
박이 물결이 마음의 터빈을 통해서 흐르게 될 때, 그 결과 정신적 힘과 영혼의 밝힘을 가져오는 것이다. 박 티 bhakti 없는 단순한 육체적 힘은 치명적이고, 인격의 힘은 없는 숭배는 진정제와 같은 것이다. 쾌락의 탐닉은 힘과 영광을 파괴한다. 그들이 쾌락 추구에 따른 감각 기능의 만족에서 쾌락에 매달리게 되고 또 되풀이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난다.
만약 감각 기능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고뇌 Soka 가 있을 따름이다. 그것들은 지식과 자제로써 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을 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했을 때 비로소 모든 힘의 원천인 ' 절대 신성'에 도움을 구한다. 이때가 바로 박치가 우러나는 단계이다. 이 우러나는 단계에서 마음, 지성, 의지는 '절대 신성'에 굴복하고, 구도자는 기도한다. '진성,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니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다른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거나 이루기 위해서 기도한다. 헌신적인 마음의 상태나 진정한 사랑의 마음에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관명이 사라질 때 개인의 영혼은 완전한 성숙 단계에 이른다.
개인의 욕구 충족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때, 마음은 '절대 신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개인의 욕구 충족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진 마음일 때는 욕망의 대상에 그의 마음이 끌려다니는 위험성이 있다. 욕망을 비우지 않는 마음으로 박치를 실천하려는 시도는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연기만을 가득 피워 불을 지피려는 이와 그 주변 사람들이 눈물을 쏟게 한다. 욕망이 있는 마음은 불이 붙어 작렬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지식이라는 불로도 빛이나 온기를 만들 수 없다.
'절대 신성'은 어둠을 밝히는 태양과 같다. 달은 태양과 마주하고 있을 때 만월이 된다. 개인의 영혼은 '절대 신성'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완전함 purnata을 경험한다. 만약 지구의 그림자가 보름달과 태양 사이에 온다면, 그것이 바로 일식이다. 내가 경험한 완전함에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그늘을 지우면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애쓴 구도자의 모든 노력이 헛되어진다. 행동은 말보다 더 잘 그의 인성을 비춰 주고 있다. 요기는 '절대 신성'에 사진의 모든 행동을 헌신하는 기술을 배웠고, 그 행동들이 그 속에서 신성을 비춰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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